초등학교 입학 전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물(40대)은 수십 년 후에야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네가 말했다면 나는 힘들어…
초등학교 입학 전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물(40대)은 수십 년 후에야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네가 말했다면 나는 힘들어서 죽었을지도 몰라.” 엄마의 말이 오히려 가슴을 때렸다.
7살부터 7년간 오빠에게 성폭력을 겪은 미미(30대)도 고등학생 때 엄마에게 처음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친족성폭력처럼 피해자를 철저히 짓누르는 폭력도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데 묶는 ‘가족’의 족쇄가 너무나 무겁다. 피해자의 발화가 가정을 뒤엎지 못하도록 위축시키고 방해한다. 살아남아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말하고 존중받은 여성은 아주 적다.
“지금도 가해자 가족들의 소식을 들어요. 평생 이 가족을 떠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공소시효는 고작 10년인가. 8살부터 23살까지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겪은 푸른나비(50대)는 분노한다. 현행법상 친족성폭력 공소시효는 최장 10년. DNA 증거 등이 있다면 최장 20년. 2011년 법 개정으로 13세 미만 피해에 대한 공소시효는 사라졌으나, 이외에는 피해자가 성인이 된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가해자를 처벌할 길이 없다.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됐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 안 되잖아요. 친족성폭력은 공소시효 없는 범죄여야만 합니다.”
여성들은 싸운다. 푸른나비는 2019년 청와대에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청원을 올렸다. 혼자가 아니다. 다른 생존자와 여성·시민단체를 찾아다니며 함께 싸우는 중이다. 2021년부터는 ‘공폐단단’(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외치는 단단한 사람들의 모임)과 함께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위를 이어왔다.
국회가 이들의 외침에 응답할까. 지난 1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친족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의결했다. 오는 27일 본회의 통과만 남았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목소리를 높여 온 생존자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친족성폭력 생존자 약 40명이 20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고 행진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친족성폭력공소시효폐지를위한공폐단단, 매마토(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일인
친족성폭력 피해자가 상담을 신청하기까지 10년 이상 걸린 사례는 55.2%. 공소시효가 지나고서야 상담을 신청한 비율은 57.9%로 높았다(한국성폭력상담소, 2022).
미미도 20여 년이 지나 성인이 되어서야 가족들과 자신의 피해에 대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피해자가 법적 절차를 진행하려면 성인이 돼 자기 기반을 갖추는 게 중요하잖아요.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공소시효가 있으면 기소조차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돼 버리죠. 형사고소 대신 민사 소송만 진행할 수 있어서 가해자들이 응당 받아야 할 벌이 줄어들기도 하고요.”
물은 남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설명해야 할 상황이 되면 불편했다. ‘지인들 앞에선 말해도 되잖아’라던 남편은 “진짜 괜찮을까?” 되묻는 물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제가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말할 수 없었던 거였어요. 친족성폭력 피해자라고 고백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굳어져 버리죠. 말을 꺼낸 사람이 뭔가 잘못한 것처럼요.
우리 사회는 친족성폭력을 ‘운 나쁜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우리 집은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가정폭력을 ‘집안일’ 취급했지만 이제는 바로 경찰에 신고할 수 있고 가정폭력 사건으로 분리되죠. 친족성폭력은 왜 그렇게 못 하나요?”
“씻을 수 없는 상처 맞지만, 거기에만 매여 있진 않아”
친족성폭력 생존자 ‘물’과 ‘푸른나비’를 지난 9일 서울 종로에서 만났다.
푸른나비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성폭력 생존자 모임 ‘작은 말하기’에 꾸준히 나간다. 최근 여성주의 글쓰기 프로그램 ‘그래서 글에 써’에도 참여했다. “나는 어른답게 말수를 줄이고 젊은 친구들이 더 말하게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글을 쓰면서 잊고 있던 아픈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요 1년간은 일도 못 할 만큼 힘들었다. “속상해요. 다른 사람들은, 젊은 친구들은 얼마나 더 아플까요.”
최근 한국 독립영화론 드물게 10만 관객을 돌파한 화제의 영화 ‘세계의 주인’(감독 윤가은)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친족성폭력 생존자인 열여덟 여고생 이야기다. 극 중 악명 높은 아동 성범죄자가 출소해 동네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반대 서명운동이 시작된다. 서명문엔 ‘성폭행은 피해자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표현이 있다. 주인공은 동의 못 한다며 거세게 항의한다. 생존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이 고통은 내가 죽을 때까지, 끝까지 가겠구나 생각했었어요.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내가 항상 거기에 매여 있진 않다. ‘그런 나’도 있고 ‘또 다른 나’도 있다고 생각해요.” (물)
“‘생존자니까 극복해야 한다’는 힘든 숙제를 안고 가는 느낌이죠. 자원이 더 많았다면 나아졌을지도요. 분명한 건 그게 사회의 몫이지, 개인이 홀로 할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푸른나비)
“그런 말에 오히려 짓눌리고 고민만 커질 수도 있을 거예요. 일단 가족과 나를 분리하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집에 불이 나면 너무 무섭지만, 그 집에서 멀어지면 일단은 괜찮아지잖아요.” (미미)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딥페이크 성범죄와 친족성폭력이 맞닿아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도 나왔다. “엄마, 누나, 동생 등을 노린 딥페이크 성범죄를 ‘지인능욕’이라 하는데요. ‘친족성폭력’이라고 분명히 명명해야 한다과 봐요. 신종 범죄, 가벼운 문제인 양 다루는 게 속상해요.” (푸른나비)
사람은 친족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영원히 ‘피해자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 목소리 내기를 바란다. 미치거나 죽지 않기를, 다른 생존자들과 연결되고 힘을 얻는 날들이 더 많기를 소망한다.
“피해자가 말을 못 하게 만든 이 사회가 바뀌어야죠. 그러니까 마음이 굉장히 가벼워졌어요. 앞으로도 말할 기회가 있다면, 누군가 들어준다면 말할 거예요.
친족성폭력은 이미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고,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너무 놀라지 마시고, 왜냐고 따지지 마시고,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살아냈는지, 어떻게 견뎠는지 물어봐 주세요.” (물)
“스스로 담담해질 때까지 믿을 만한 장소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혼자 계속 정리하는 일을 반복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거듭되는 폭력을 마주하면서 자신 안의 선, 정, 강함, 생명, 부드러움, 용서 같은 가치를 찾아가는 자체가 보람 있는 여정이잖아요. 세상은 아름답다, 행복하다, 즐겁고 보람찬 경험을 많이 쌓으세요. 부정적인 기억의 비중을 줄일 만큼 잔뜩이요. 그러면 되게 괜찮아요. 멋진 인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미)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우리에게 답을 줄 때입니다. 제대로 된 어른들을 만나지 못했던 우리에게 사회와 국가가 최소한의 어른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선 ‘살아있어만 달라’고 합니다. 그 말에 함께 책임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겐 가해자보다 잘 살아가고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푸른나비)
출처 : 여성신문(https://www.womennews.co.kr)
7살부터 7년간 오빠에게 성폭력을 겪은 미미(30대)도 고등학생 때 엄마에게 처음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친족성폭력처럼 피해자를 철저히 짓누르는 폭력도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데 묶는 ‘가족’의 족쇄가 너무나 무겁다. 피해자의 발화가 가정을 뒤엎지 못하도록 위축시키고 방해한다. 살아남아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말하고 존중받은 여성은 아주 적다.
“지금도 가해자 가족들의 소식을 들어요. 평생 이 가족을 떠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공소시효는 고작 10년인가. 8살부터 23살까지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겪은 푸른나비(50대)는 분노한다. 현행법상 친족성폭력 공소시효는 최장 10년. DNA 증거 등이 있다면 최장 20년. 2011년 법 개정으로 13세 미만 피해에 대한 공소시효는 사라졌으나, 이외에는 피해자가 성인이 된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가해자를 처벌할 길이 없다.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됐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 안 되잖아요. 친족성폭력은 공소시효 없는 범죄여야만 합니다.”
여성들은 싸운다. 푸른나비는 2019년 청와대에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청원을 올렸다. 혼자가 아니다. 다른 생존자와 여성·시민단체를 찾아다니며 함께 싸우는 중이다. 2021년부터는 ‘공폐단단’(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외치는 단단한 사람들의 모임)과 함께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위를 이어왔다.
국회가 이들의 외침에 응답할까. 지난 1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친족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의결했다. 오는 27일 본회의 통과만 남았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목소리를 높여 온 생존자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친족성폭력 생존자 약 40명이 20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고 행진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친족성폭력공소시효폐지를위한공폐단단, 매마토(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일인
친족성폭력 피해자가 상담을 신청하기까지 10년 이상 걸린 사례는 55.2%. 공소시효가 지나고서야 상담을 신청한 비율은 57.9%로 높았다(한국성폭력상담소, 2022).
미미도 20여 년이 지나 성인이 되어서야 가족들과 자신의 피해에 대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피해자가 법적 절차를 진행하려면 성인이 돼 자기 기반을 갖추는 게 중요하잖아요.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공소시효가 있으면 기소조차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돼 버리죠. 형사고소 대신 민사 소송만 진행할 수 있어서 가해자들이 응당 받아야 할 벌이 줄어들기도 하고요.”
물은 남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설명해야 할 상황이 되면 불편했다. ‘지인들 앞에선 말해도 되잖아’라던 남편은 “진짜 괜찮을까?” 되묻는 물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제가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말할 수 없었던 거였어요. 친족성폭력 피해자라고 고백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굳어져 버리죠. 말을 꺼낸 사람이 뭔가 잘못한 것처럼요.
우리 사회는 친족성폭력을 ‘운 나쁜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우리 집은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가정폭력을 ‘집안일’ 취급했지만 이제는 바로 경찰에 신고할 수 있고 가정폭력 사건으로 분리되죠. 친족성폭력은 왜 그렇게 못 하나요?”
“씻을 수 없는 상처 맞지만, 거기에만 매여 있진 않아”
친족성폭력 생존자 ‘물’과 ‘푸른나비’를 지난 9일 서울 종로에서 만났다.
푸른나비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성폭력 생존자 모임 ‘작은 말하기’에 꾸준히 나간다. 최근 여성주의 글쓰기 프로그램 ‘그래서 글에 써’에도 참여했다. “나는 어른답게 말수를 줄이고 젊은 친구들이 더 말하게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글을 쓰면서 잊고 있던 아픈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요 1년간은 일도 못 할 만큼 힘들었다. “속상해요. 다른 사람들은, 젊은 친구들은 얼마나 더 아플까요.”
최근 한국 독립영화론 드물게 10만 관객을 돌파한 화제의 영화 ‘세계의 주인’(감독 윤가은)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친족성폭력 생존자인 열여덟 여고생 이야기다. 극 중 악명 높은 아동 성범죄자가 출소해 동네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반대 서명운동이 시작된다. 서명문엔 ‘성폭행은 피해자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표현이 있다. 주인공은 동의 못 한다며 거세게 항의한다. 생존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이 고통은 내가 죽을 때까지, 끝까지 가겠구나 생각했었어요.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내가 항상 거기에 매여 있진 않다. ‘그런 나’도 있고 ‘또 다른 나’도 있다고 생각해요.” (물)
“‘생존자니까 극복해야 한다’는 힘든 숙제를 안고 가는 느낌이죠. 자원이 더 많았다면 나아졌을지도요. 분명한 건 그게 사회의 몫이지, 개인이 홀로 할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푸른나비)
“그런 말에 오히려 짓눌리고 고민만 커질 수도 있을 거예요. 일단 가족과 나를 분리하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집에 불이 나면 너무 무섭지만, 그 집에서 멀어지면 일단은 괜찮아지잖아요.” (미미)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딥페이크 성범죄와 친족성폭력이 맞닿아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도 나왔다. “엄마, 누나, 동생 등을 노린 딥페이크 성범죄를 ‘지인능욕’이라 하는데요. ‘친족성폭력’이라고 분명히 명명해야 한다과 봐요. 신종 범죄, 가벼운 문제인 양 다루는 게 속상해요.” (푸른나비)
사람은 친족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영원히 ‘피해자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 목소리 내기를 바란다. 미치거나 죽지 않기를, 다른 생존자들과 연결되고 힘을 얻는 날들이 더 많기를 소망한다.
“피해자가 말을 못 하게 만든 이 사회가 바뀌어야죠. 그러니까 마음이 굉장히 가벼워졌어요. 앞으로도 말할 기회가 있다면, 누군가 들어준다면 말할 거예요.
친족성폭력은 이미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고,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너무 놀라지 마시고, 왜냐고 따지지 마시고,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살아냈는지, 어떻게 견뎠는지 물어봐 주세요.” (물)
“스스로 담담해질 때까지 믿을 만한 장소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혼자 계속 정리하는 일을 반복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거듭되는 폭력을 마주하면서 자신 안의 선, 정, 강함, 생명, 부드러움, 용서 같은 가치를 찾아가는 자체가 보람 있는 여정이잖아요. 세상은 아름답다, 행복하다, 즐겁고 보람찬 경험을 많이 쌓으세요. 부정적인 기억의 비중을 줄일 만큼 잔뜩이요. 그러면 되게 괜찮아요. 멋진 인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미)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우리에게 답을 줄 때입니다. 제대로 된 어른들을 만나지 못했던 우리에게 사회와 국가가 최소한의 어른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선 ‘살아있어만 달라’고 합니다. 그 말에 함께 책임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겐 가해자보다 잘 살아가고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푸른나비)
출처 : 여성신문(https://www.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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