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할아버지가 자살하여 큰아버지 손에 맡겨져 온갖 설움을 받고 자랐다…
이런 우리 집에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나는 돈이 들지 않는 육사에 지원했는데 1차 심사에서 덜컥 떨어지고 그 충격에 수능시험까지 망쳤다. 결국 뜻하지 않은 춘천교대에 입학하고 한마음교회 대학생 기숙사에 들어갔다. 힘들게 자란 내게 기숙사의 규칙과 새벽기도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그때부터 신앙적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버지 때문인지 내게 하나님 ‘아버지’는 무척 무서운 분이었다. 성경책 하나 툭 던져주고 ‘무조건 믿어!’ 또는 풀기 힘든 문제 하나 내주고 ‘너 못 풀면 지옥이야!’ 하시는 분 같았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뭐가 저렇게 확실할까? 저런 확신과 기쁨은 어디서 올까?’ 그 대답을 꼭 찾고 싶었다. 그러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실 것이 구약에 예언되었다는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부활의 사실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하나님께선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을 불러주셨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 손가락을 넣어봐야겠다던 도마,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울. 모두가 한순간에 삶이 바뀌어 순교하면서도 부활을 전한 것에 놀라 바로 그들에게 질문을 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왜 사랑하는 가족도, 재물도,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쳤습니까?” 제자들은 사도행전을 통해 대답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진실을 전하기 위해 가족과 목숨까지 버릴 수 있나?” 즉시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순간,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이 선명해지며 십자가 뒤편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졌다. 아들까지 내어 주시는 그 사랑 앞에 나는 바로 굴복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했다. 그러자 모든 고민이 한 순간에 풀렸다.
가족과 불쌍하게 산 어머니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원혁아, 아무 염려하지 말고 너는 나의 일을 해라. 내가 너의 일을 할게.” 하시는 것 같았다. 대학 졸업 후, 장교로 입대하여 쉴틈 없이 병사들을 만났다. 위급한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 지금 어머니께 갈 수 없습니다. 제가 이 영혼들을 다 살릴 테니까 어머니를 놓지 말아주세요.” 기도한 지 7년 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놀라운 가족의 변화였다. 어머니는 신경안정제를 끊고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나오고 누님은 지금 고등학교 교사로 학교에서, 기독교 특활반에서 복음을 전한다. 형도 천사 같은 전도사 형수를 만나 믿음의 길을 걷고 있다.
십자가 사랑으로 내 곁의 영혼들을 살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었고 나의 온 마음은 아이들을 향했다. 급훈을 ‘삶-사랑=0’으로 정하고 사랑을 쏟아 붓자 하교 후 학원에 갔던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왔고, 퇴근 후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아이들과 소통하며 공부하고 고민도 들어주었다. 그러자 나에게 마음이 열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기 시작했다. 전교에 소문 난, 도저히 변할 수 없을 것 같던 아이들의 변화에 동료 교사들은 충격을 받았고, 무채색 같던 아이들에게 각자의 빛깔을 찾아 주는 사랑과 열정에 학부모들도 감동을 받아 마음을 활짝 열었다.
매년 새 학기가 되면 서원혁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술렁인다. 학교를 옮길 때엔 소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가는 학교마다 기독교 동아리가 세워지고, 교사들의 신우회가 생겨났다. 부모님들을 통해 지역사회까지 번져 지역 내 초 중 고 기독교 동아리 연합예배도 드린다. ‘교육 순교자’ ‘영혼을 갈아 넣어 가르치는 교사’로 불리게 된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오늘도 기쁨으로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로 향한다.
-
아버지는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할아버지가 자살하여 큰아버지 손에 맡겨져 온갖 설움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일을 하느라 공부를 할 수 없었고, 맷돌에 맞아 팔이 부러지자 공부를 포기했다. 결혼을 하고 광산에서 연탄을 캐며 매일 됫병 소주에 취해 살았다. 그러다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로 보상금을 받아 서울로 이사를 왔다.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좌절감에 술만 찾았고, 수시로 우리들을 발가벗겨 쫓아내고, 허리띠 채찍으로 때리고, 손을 묶어 방 문에 매달아 벌을 세웠다.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의심하며 난폭하게 때렸다. 어머니는 불의의 사고로 20대 두 동생을 잃고, 그 충격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까지 네 가족을 한 순간에 잃었는데 아버지의 핍박까지 겹쳐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혼자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상스러운 욕을 하고, 발자국 소리에도 공포에 떠는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뇌출혈로 쓰러졌다. 우리 집안은 캄캄했고, ‘아버지가 우리를 언제 죽일까? 엄마는 언제 자살할까?’하는 불길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우리 집에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나는 돈이 들지 않는 육사에 지원했는데 1차 심사에서 덜컥 떨어지고 그 충격에 수능시험까지 망쳤다. 결국 뜻하지 않은 춘천교대에 입학하고 한마음교회 대학생 기숙사에 들어갔다. 힘들게 자란 내게 기숙사의 규칙과 새벽기도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그때부터 신앙적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버지 때문인지 내게 하나님 ‘아버지’는 무척 무서운 분이었다. 성경책 하나 툭 던져주고 ‘무조건 믿어!’ 또는 풀기 힘든 문제 하나 내주고 ‘너 못 풀면 지옥이야!’ 하시는 분 같았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뭐가 저렇게 확실할까? 저런 확신과 기쁨은 어디서 올까?’ 그 대답을 꼭 찾고 싶었다. 그러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실 것이 구약에 예언되었다는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부활의 사실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하나님께선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을 불러주셨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 손가락을 넣어봐야겠다던 도마,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울. 모두가 한순간에 삶이 바뀌어 순교하면서도 부활을 전한 것에 놀라 바로 그들에게 질문을 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왜 사랑하는 가족도, 재물도,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쳤습니까?” 제자들은 사도행전을 통해 대답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진실을 전하기 위해 가족과 목숨까지 버릴 수 있나?” 즉시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순간,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이 선명해지며 십자가 뒤편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졌다. 아들까지 내어 주시는 그 사랑 앞에 나는 바로 굴복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했다. 그러자 모든 고민이 한 순간에 풀렸다.
가족과 불쌍하게 산 어머니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원혁아, 아무 염려하지 말고 너는 나의 일을 해라. 내가 너의 일을 할게.” 하시는 것 같았다. 대학 졸업 후, 장교로 입대하여 쉴틈 없이 병사들을 만났다. 위급한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 지금 어머니께 갈 수 없습니다. 제가 이 영혼들을 다 살릴 테니까 어머니를 놓지 말아주세요.” 기도한 지 7년 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놀라운 가족의 변화였다. 어머니는 신경안정제를 끊고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나오고 누님은 지금 고등학교 교사로 학교에서, 기독교 특활반에서 복음을 전한다. 형도 천사 같은 전도사 형수를 만나 믿음의 길을 걷고 있다.
십자가 사랑으로 내 곁의 영혼들을 살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었고 나의 온 마음은 아이들을 향했다. 급훈을 ‘삶-사랑=0’으로 정하고 사랑을 쏟아 붓자 하교 후 학원에 갔던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왔고, 퇴근 후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아이들과 소통하며 공부하고 고민도 들어주었다. 그러자 나에게 마음이 열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기 시작했다. 전교에 소문 난, 도저히 변할 수 없을 것 같던 아이들의 변화에 동료 교사들은 충격을 받았고, 무채색 같던 아이들에게 각자의 빛깔을 찾아 주는 사랑과 열정에 학부모들도 감동을 받아 마음을 활짝 열었다.
매년 새 학기가 되면 서원혁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술렁인다. 학교를 옮길 때엔 소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가는 학교마다 기독교 동아리가 세워지고, 교사들의 신우회가 생겨났다. 부모님들을 통해 지역사회까지 번져 지역 내 초 중 고 기독교 동아리 연합예배도 드린다. ‘교육 순교자’ ‘영혼을 갈아 넣어 가르치는 교사’로 불리게 된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오늘도 기쁨으로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로 향한다.